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접대의 관습 (문단 편집) ==== 손님의 주인 공격 사례 ==== 아래의 사례는 위의 사례들과는 다르게 손님이 해당 지역의 주인에게 대접을 받았음에도 주인을 공격한 사례다. * 고대 이탈리아인 용병 마메르틴 용병들이 메시나 시를 점령한 사례 마메르틴 용병들은 이탈리아 출신의 라틴계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처음에는 근거지 없이 시칠리아 섬을 떠돌아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날 이들은 피로에 지쳐 메시나 시에 그들이 잠시 머물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메시나 시민들은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들에게 성내에 휴식처를 주고 식량까지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용병들은 이 도시가 살기 좋은 것을 보고 야밤에 시민들을 기습 공격하는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 이들은 메시나 시의 모든 남자들을 죽여버리고, 여자들은 모두 포로로 잡아 각 병사들에게 분배했다. 이러한 만행은 시칠리아 섬에 있던 그리스계 시민들의 분노를 사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 학살당한 메시나 시민들이 그리스계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포에니 전쟁]]이 일어났다. * 글렌코의 학살 1692년에 있었던 사건인데 표면상으로는 맥도날드 클랜이 [[윌리엄 3세]]의 충성서약서에 늦게 서명했다는 이유로 일어났다. 당시 맥도날드 클랜의 대표는 악천후 때문에 정해진 데드라인 직전에 목표한 곳에 도착했고, 그곳에는 충성서약을 받아줄 사람이 부재하는 등의 악재가 겹쳤다. 전후사정을 고려하면 충성서약의 지연을 문제 삼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글렌코의 맥도날드 클랜은 캠벨 클랜의 지휘관이 이끄는 병사들이 방문했을 때도 즉각적인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다. 열흘 이상 후하게 대접받던 병사들은 2월 13일 새벽에 갑자기 돌변하여 주민들을 학살하였는데 희생자 수는 40에서 300 정도로 다양한 견해가 있다. * [[조조]]의 [[여백사]] 살해 출전에 따라 정당방위로 기록되어 있는 책도 있지만, 현대의 사학자들은 대체로 조조가 접대를 받았음에도 배은망덕하게 이를 살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초 정당방위라고 주장하는 쪽은 조조 옹호의 성격이 좀 있었다. * [[제너럴 셔먼호 사건]] 어쨌든 조선에선 셔먼호 인원들을 손님으로 대접한 뒤 타일러 돌려보내려 했지만 셔먼호는 자신들의 욕심을 버리지 못해 주인 입장에 있던 조선을 공격한 사건이다. * [[오페르트 도굴 사건]] 오페르트 일행이 남연군 묘를 도굴하기 전까지 조선에선 나름 접대의 관습을 베풀었다. * [[유유(고구려)]] 적장에게 접대를 하다 틈을 노려 적장을 죽이고 자결했다. 접대를 한 쪽은 유유였지만, 일단 적진에 손님으로서 직접 찾아갔으므로 이쪽에 등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